내 이름은 빨강

카테고리 없음 2015. 5. 4. 01:58

왕후이와의 대화 : “일대일로”는 어떻게 “세계역사 경로의 새로운 수정”이 되는가

作者:林岛

보아오(博鳌) 아시아 포럼의 개막을 맞아, 중국이 제기한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다시금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개혁개방 30여년 동안 방대한 저가 노동력의 우위를 이용하여 중국은 전세계 경제성장을 추동하는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그러나 방대한 생산능력에 걸맞지 않게 국내적으로는 심각한 빈부격차와 소비 부족 및 그로 인해 초래된 여러 산업분야의 지나친 잉여 생산력으로 시달리고 있다. 생산된 그 많은 상품을 어디에 팔 것이며, 그 많은 잉여자본은 어디에서 출로를 찾을 것인지가 현재 중국 지도부가 해결해야 할 가장 긴박한 문제가 되었다. 그에 발맞춰 대국의 총리인 리커창이 외국 정상과의 만남에서 종종 세일즈맨 역할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잉여 생산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중국경제는 높은 성장추세를 유지하기 어려울 게 분명하고, 국내적으로 취업과 사회 안정 측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중국이 “일대일로” 전략을 제기한 전반적인 배경이다.

“일대일로”와 AIIB는 국내의 심각한 잉여 생산력을 해결하려는 긴박한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미국 패권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 경제 질서를 구축하는 결정적인 한 걸음이기도 하다. 나아가 일부 연구자들은 중국판 마셜 계획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마셜 계획을 통해 대량의 잉여 생산력을 유럽으로 수출하였으며, 그 결과 유럽은 4년 만에 2차 대전 이전 수준으로 회복했고 미국경제는 바닥에서 탈출하여 10여 년의 번영이 도래했다. 중국이 제기한 일대일로 전략은 의심할 바 없이 구미 국가들이 잉여 생산력을 해결한 경험을 참고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구미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잉여 생산력 문제를 해결한 것은 2차 대전 이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제도의 탄생 직후 곧바로 경제 위기와 생산 과잉 문제와 맞닥뜨렸으며, 잉여 상품과 자본의 출로를 찾는 과정에서 19세기 식민주의의 파도가 전세계를 휩쓸었다. 상품과 자본의 수출은 필연적으로 무력 확장을 대동했다. 군함과 강력한 대포가 뒷받침해 주지 않았다면 경제 수출도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패권의 확장을 수반하고, 경제적 충돌은 필연적으로 정치 및 군사적 충돌을 수반하였다. 새로운 경제 중심이 출현하고 성장할 때마다 기존의 패권 체계에 대한 도전이 뒤따랐으며, 그 와중에 전쟁, 폭력 및 피비린내는 끊이지 않았다. 영국의 산업혁명시대 진입 이래 기나긴 전지구적 충돌과 전쟁은 모두 이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정부는 중국이 “예로부터” 평화를 사랑한 나라임을 공언했다. 그렇다면 “일대일로” 전략과 자본 수출은 “장기 19세기”의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와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중국의 굴기는 대체 전원시 풍의 평화의 찬가인가, 아니면 또 다른 피비린내 나는 여정의 시작인가? 이 문제는 우리가 반드시 직시하고 대답해야 할 문제이다.

일부 학자들은 19세기 식민주의와 같아 보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측면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도 새로운 시장과 투자공간을 찾아야 하고, 중국의 상품 또한 세계시장에 진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국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옛 식민지주의와 제국주의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형식의 국제 협력을 꾀한다.”(郑永年) 그러나 쉽게 드러나는 문제는, 중국이 이처럼 방대한 상품과 자본을 국외로 수출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나라의 자본과 정치세력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나라에 생겨날 수도 있을 정치적 위험을 어떻게 방비할 것인가? 또 다른 문제는, 중국 모델의 성공과 세계 공장 지위의 확립은 중국의 풍부한 저가 노동력 착취에 기반한 것인데, 그 결과 첨예한 노사분쟁이 중국 사회의 불안정 요소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자본의 대규모 해외 수출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노사 충돌을 국외로 수출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 국내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년 전 잠비아 광부에게 중국인 관리자가 피살된 사건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이들 국가의 정부가 중국의 노동자 항쟁의 억제를 도와(?) 중국 자본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제한하도록 보장할 것인가?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중국의 굴기와 중국 경제의 세계적 범위로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미국의 세계 패권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중국과 미국이 대표하는 패권 체계 사이의 충돌과 모순은 분명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충돌을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가?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국내에서 “持剑经商”(검, 즉 무력을 동반한 상업행위)을 부르짖는 민족주의 사조가 생겨났다. 이러한 사조는 방대한 자본과 상품 수출 상황에서 해방군이 중국의 해외 이익을 위해 적극적인 보호조치를 취해야 하며, 나아가 미국을 핵심으로 한 세계 패권체계를 깨뜨리고 새롭게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계와 질서를 재건해야 한다는 점에서 제기되었다. 비록 너무 솔직해서 국내 주류에게 수용되기 힘든 측면이 있지만 많은 주류 학자들의 속마음임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정융녠은 “중국 정부가 아직 충분히 공격적(aggressive)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본이 (국외로) 나간 후 더 많은 권익의 보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국이 멕시코에 투자한 고속철도, 미얀마에서의 여러 투자 등이 모두 문제에 부닥쳤지만, 현재 딱히 해결할 수단이 없다. 새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해외이익을 보호할 것인지에 대해 중국정부의 조처는 상당히 뒤떨어지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더욱 “aggressive”하게 중국의 해외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만약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중국의 굴기는 영미의 패권 장악 방식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 된다. 단지 새롭게 중국을 중심으로 한 패권체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패권체계를 대체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최종적으로 성공할 것인지의 여부는 중미 양국의 군사력 대결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이는 세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20세기 제국주의의 재난을 다시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왕후이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만약 단지 국내의 잉여 생산력 해결과 중국 자본의 금융적 확장의 실현에만 주목한다면 자본주의의 옛 방식을 반복할 뿐이다. “일대일로”는 성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거대한 위험과 반발을 촉발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만약 “자본주의 경제논리가 이 광활하고 복잡한 네트워크를 주재하는 국면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이 프로젝트는 필연적으로 보복당하고 실패할 것이다.

왕후이는 “일대일로”에 어느 정도 사회주의적 색채를 부여했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일대일로”는 절대 단일국가적 프로젝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영토 및 그 확장을 목표로 한 제국 재건 프로젝트가 아니라 미일 해상동맹과 같은 냉전 식의 낡은 방식과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노선이자, 냉전 구도를 넘어서고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미래적 방향, 즉 “세계 역사 경로에 대한 새로운 수정”이다. 따라서 그것은 “불가피하게 21세기적 사회주의 특색을 지닌 공동의 길”이다.

왕후이 교수의 “일대일로”에 대한 기대는 다분히 이상적 색채를 지니고 있어 생각처럼 실현되지는 않을 것 같다. 현실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을 것이다. 왕후이가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 경제위기의 핵심은 경제가 정치, 문화, 풍속, 종교 등과 유리된 것에 있고, 경제의 사회관계에 대한 파괴에 있는데 중국은 이러한 진행과정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최근 30여 년 간, 우리는 시장과 자본이 중국 사회에 스며들어 와해시키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 의식주에서 교육, 의료, 주거 및 혼인, 사랑, 가족애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시장에서의 이익을 최우선 목표로 한 상품으로 전락하였다. 노동자는 이전의 사회보장 일체를 상실하여 “보이지 않는” 그 잔혹한 손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점에 있어 중국은 결코 미국보다 나을 게 없다.

국제관계는 단지 국내관계의 확장일 뿐이다. “일대일로”가 “21세기적 사회주의 특색을 지닌 공동의 길”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중국사회 내부에서 “경제의 사회관계에 대한 파괴”를 탈피할 수 있는지, 시장과 자본의 사회에 대한 침투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역전시킬 충분한 힘이 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만약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없다면, “일대일로”는 신자유주의 및 근대 이래 전지구적 패권을 극복하는 해방의 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더 많은 저개발 국가에 한층 더 침투시키고, 고유의 사회관계와 사회보호를 더 한층 파괴시켜 새로운 자본주의 패권을 만드는 길이 된다. 이는 “세계 역사 경로에 대한 새로운 수정”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기존 경로의 확장에 불과하다. 미국을 핵으로 한 세계 자본주의 체계가 닿지 못한, 혹은 완전히 주도적이지는 않은 지역으로의 확장 말이다.

다시 말해, “일대일로” 자체가 역사적 진보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국 국내 “사회”가 “시장”의 운동에 저항하여 승리를 거둔다는 전제하에서만 “일대일로”는 기존의 역사 경로에 대한 극복이 될 수 있으며, 21세기적 사회주의 특색을 지닌 공동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후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귀결된다. 중국이 “역사종말론”의 범주 바깥에서 시장사회와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여,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 공간을 열고 새로운 힘과 가능성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마르크스의 명언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다.

(2015.05.04. 초역)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