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카테고리 없음 2015. 5. 4. 02:02
汪晖, “一带一路”走出历史终结论阴影

경제 중심이 구미에서 아시아로 전환됨에 따라 대륙과 해양의 관계에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일대일로” 전략은 실크로드 경제권역, 21세기 해상 실크로드, 중-인도 및 중-파키스탄 회랑(中印中巴两走廊), 유라시아 대륙 가교(欧亚大陆桥) 등 많은 범주를 포함하고 있어 대륙간 연결의 중요성이 현저히 증가하고 있다. 만약 미일 해상동맹이 냉전 구도의 확장이라면, “일대일로”는 역사 경로에 대한 회귀이다.

자본주의의 길을 반복한다면, “일대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일대일로”에 필요한 건 평등과 함께 다양성

“일대일로”는 탄탄대로의 프로젝트가 아닐 것이다. 단지 경제학자들이 거론하는 자금, 자원, 시장, 노동력 측면에서 뿐 아니라 정치, 문화 및 기타 제반 분야에서 기인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세계경제 중심의 아시아로의 이동은 장차 일련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언어 등의 측면에서 문제를 가져올 것이다. 반대로 자본주의 경제위기의 핵심은 경제가 정치, 문화, 풍속, 종교 등과 유리된 것에 있고, 경제의 사회관계에 대한 파괴에 있다. 따라서 “일대일로”는 자본주의 경제모델을 개혁하는 장기적인 과정일 것이며, 또한 필연적으로 역사문명과 미래의 사회주의가 서로 연결되는 과정을 겪을 것이다.

역사문명을 거론하는 것은 이 새로운 프로젝트의 결정적인 네 개념, 즉 길, 띠, 회랑, 다리가 아시아의 트랜스 사회 시스템 혹은 역사문명의 연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대 실크로드가 물질적 교류 통로였을 뿐 아니라 정신적 교류의 연결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대일로”는 광활한 육지와 해양을 뛰어 넘어 다른 민족, 종교, 언어, 풍속과 전통을 연결할 것이다. 만약 문화간의 교류가 없다면 이 거대한 청사진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불가피하게 사회주의적 색채를 지닐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임의의 자본주의적 경제논리가 이 광활하고 복잡한 네트워크를 주재하는 국면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필연적으로 기존의 각종 발전주의 모델, 특히 신자유주의적 발전주의 모델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며, 문화다양성 및 생태다양성의 파괴로 인하여 실패와 보복을 맞이할 것이다.

“일대일로”는 단일국가 프로젝트가 아니다. 영토 및 그 확장을 목표로 한 제국 재건 프로젝트도 아니다. 그것은 “상호연결과 상호소통”을 중심개념으로 하고, 여러 겹의 복합적인 참여를 기본 내용으로 하는 동태적인 과정이다. 이 미증유의 세계적 실험 상황에서는 깊이와 장기적 안목을 결여한 어떠한 경제 계획, 금융 확장 및 군사적 모험도 정반대의 결과만 불러올 것이다. 현재 “일대일로”를 언급하는 대다수는 두 가지 핵심 문제만 거론한다. 즉, 국내의 잉여 생산력과 금융 확장이 그것이다. 이 두 문제는 모두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문제이다. 만약 자본주의의 옛 길을 되풀이한다면 “일대일로”는 성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크나큰 위험과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다. 중국 대륙의 연안 경제의 발전과 유라시아 대륙의 관계의 변화는 전지구적인 역사적 변화를 견인하고 있다. 대륙과 해양의 관계도 역전까지는 아닐지라도 크게 변화할 것이다.

“길, 띠, 회랑, 다리”와 주변의 비주변화, 중심의 비중심화


역사상 모든 창조적인 연결은 지역 관계의 변화를 불러왔다. 예를 들어 수나라의 대운하 건설은 송대에 이르러 운하를 중심으로 한 경제 시스템을 탄생시켰다. 한 일본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운하의 건설은 세계 역사적 대사건이다. 그것은 아시아 내륙무역과 연해무역을 연결하여 중국역사상 황하 중심시대를 이은 운하 중심시대를 형성시켰다. 사실 운하가 연결한 것은 상품과 무역에 그치지 않는다. 중동, 동남아 및 남아시아의 문명, 종교, 문화가 중국 내지로 깊숙이 들어와 중국문화의 복사력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미국의 중국학자 래티모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장성의 역할은 단지 군사적 방어시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그것은 농경문명과 유목문명을 연결하는 회랑이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하여 그는 장성을 중심으로 한 내륙 아시아 담론을 제기하였다. 그 글에서 장성은 두 문명의 “상호 변경(邊境)”임과 동시에 중국과 아시아 역사의 “중심지대”로 다루어졌다. 운하, 장성 및 우리가 지금 논의 중인 “길, 띠, 회랑, 다리”는 “상호연결과 상호소통”의 개념을 통해 지나치게 안정적인 중심-주변의 관계를 초월할 길을 찾을 이론적 잠재력을 담고 있다.

이러한 예가 말해주는 것은 역사적 현실에 중심과 주변의 물질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관계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이자 상호전환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길, 띠, 회랑, 다리”의 개념이 추동하는 것은 새롭게 역사를 바라보고, 현실을 바라보며, 지역관계와 문화적 관계를 바라볼 새로운 방법과 시야, 즉 주변의 비주변화, 중심의 비중심화, 기원의 비기원화이다. “상호연결과 상호소통”을 중심으로 우리는 서로가 중심이자 서로가 주변인 새로운 시각을 형성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새롭게 세계를 이해하고 각종 중심주의적 사상적 방법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현실적인 풍경이 아니라 이상적인 청사진이며, 일종의 새로운 역사관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른바 서로가 중심이자 서로가 주변인, 기원의 비기원화라는 말은 자기중심적인 위계적 역사관을 초월하는 것이지, 그 옛날 식민주의자와 제국주의자들처럼 자기를 중심으로 한 채 나머지 지역을 그 중심에 종속된 주변 혹은 반주변(亚边缘)으로 줄세운 위계적 시스템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 띠, 회랑, 다리”는 “상호연결과 상호소통”을 핵심으로 하며, 다른 지역들로 하여금 서로 의존하면서도 각자의 독립성을 인정하게 함과 동시에 서로가 중심인 체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봤을 때, 다른 지역을 자국 상품의 땡처리(倾销) 장소 혹은 자원 생산지 정도로 낮춰 보는 것은 다민족 문화 사이의 상호 주체적 지위를 존중할 줄 모르는 태도이다. 그것은 “길, 띠, 회랑, 다리” 개념에 부가된 가치와 의미에 위배되는 것이다.

“일대일로”는 21세기적 사회주의 특색을 지닌 공동의 길이다.


지금은 전지구적인 정치 위기의 시대이다. 오늘날의 현실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사방에 도사리고 있다. 주변지역 뿐 아니라 중심지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중국 정치의 새로운 형태를 탐색하는 것은 개별적이거나 국부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 전체 국면에 대한 의의가 있다.

이제 새로운 방향에 대해 설명해야겠다. 쉽진 않지만 몇 가지 점은 분명하다. 첫째, 이는 전지구화의 과정에서 출로를 검토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유리된 채 새로운 길을 이야기할 수 없다. 둘째, 동아시아 지역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함에 불기피하게 전지구적 노동 분업과 전지구적 관계에서의 발전과 변동, 특히 정치, 군사 중심과 경제, 금융 중심의 분리 추세 및 그 결과를 논의해야 한다. 셋째, 그것은 냉전 구도를 초월하고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미래의 길이며, 근대 이래 형성된 패권 시스템을 깨뜨리고 그 새로운 형식을 해방하는 길이며, 오랜 역사 문명 및 그것의 근대적 발자취를 배경으로, 당대의 각종 선진적 경험을 종합하는 창조성을 계승하는 길이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 그것은 불가피하게 21세기적 사회주의 특색을 지닌 공동의 길이다.

“불가피”하다고 말한 것은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각도에서 보자. 현실의 자본주의 경제는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수시로 강력한 경제력을 대동하여 각종 사회관계와 문화 전통을 훼손하고 파괴할 수 있다. 교육, 의료, 주거 및 혼인, 가정, 사랑에 이르기까지 시장경제의 힘에 침투당하거나 영향받지 않는 것이 없다. 국내이건 국제관계에서건 불평등한 노사관계, 도농관계, 지역관계는 종종 경제발전의 정상 상태이거나 “동력”이기까지 하다. 만약 역량 있는, 사회주의 색채를 지닌 운동이 경제생활을 사회 네트워크 내부로 다시 귀속시키지 못하고 임의의 시장 관계가 모든 사회 관계를 주재한다면 “일대일로”는 과거의 자본주의의 낡은 경로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며, “주변 지역”을 지배, 통제, 파괴하는 새로운 과정이 될 것이다. “일대일로”는 자연적인 과정일 수가 없으며 상이한 힘들이 각축하는 과정이다. 결론적으로, “역사종결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억압되어 있는 미래적인 요소를 펼쳐낼 수 있는지의 여부는 우리의 실천에, 우리가 실천해 가는 동력과 방향에 달려 있다.

(2015.05.04. 초역)


Posted by lunarog